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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연극 <이광수의 꿈, 그리고 꽃> 리뷰2

by 김자오 2021.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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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김수현 배우

허영숙: 성여진 배우

관음, 월례, 노파: 김정은 배우

최남선: 황건 배우

조신: 한승엽 배우

평목, 코러스: 김석영 배우

미력, 최기자, 원님: 장하란 배우

월례, 버들, 코러스: 이수진 배우

용선선사, 화랑 모례, 코러스: 김영준 배우

그림자: 최강현 배우

 

백신 2차 접종으로 인한 여러 증상들 속에서 다시 키보드 앞에 앉았다. 과연 내가 이것을 쓸 수 있을 것인가! 어젯밤까지는 생각나는 것들이 많아서 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일어나고 보니 제정신이 아닌 듯하다. 그래도 일단 쓰는 데까지 써 봐야지.

 

개인적인 리뷰

이광수: 이미지로 따지자면 강의 잔물결이 이는 모습 같았다. 고이지 못하고, 바닥이 깊지 않은, 그냥 뒤에서 미는 대로 흘러가면서도 때때로 바람에 한 번 철썩여 주는 모양새. 힘없이 흐르지만 개울처럼 흩어지지 않고 줄기를 이어 가는 물줄기.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흔들리거나 조각난 모습, 혹은 존재감 없는 모습은 또 아니었다. 그의 존재를 내보인 것은 민족을 위해 애썼을 뿐이라는 변명과 억울함과 한편의 당당함일 수도 있고, 죄책감과 수치심일 수도 있다. 그 존재감 때문인지 여러 사람 틈에서 조용히 앉아 있을 때에도 시선을 잡아끈다. 이광수는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지 않는 듯하지만 어떤 것도 부정하며 동시에 인정하는 듯도 보인다. 그가 내뱉는 말과 목소리, 표정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볼 수 있다. 대본상 주인공이라서 밀어주는 것이 있다, 이런 것보단 그냥 배우가 무대에서 계속 시선을 잡는다. 잡아끈다거나, 잡아챈다는 표현보다는 그냥 잡고 있는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나 여기 있다, 이게 아니라 그냥 관객이 자연스럽게 이광수의 이야기임을, 이광수가 거기 있음을 알게끔 그냥 거기 있다. 거기 있는데 관객들이 자연스레 보게 된다.

허영숙: 인물은 나무와 같다. 바닥 깊이 뿌리를 박고 선 커다란 나무. 바람이 불면 잔가지가 흔들리지만 단단한 기둥은 끄떡도 않는 듯하다. 대사하는 건 비단 같아. 손이 닿으면 사르르 흘러내릴 것 같은 매끄러움. 대사가 정말 쉽게 들리고 그래서 인물을 알기가 더 쉽다. 목소리나 발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 말이나 표정이 뭘 얘기하는지 드러난다. 허영숙이 좋다. 죽은 아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도 살아 있는 가족을 위해, 그의 말마따나 싸우는 인물이다. 웃기도 하고 툴툴거리기도 하고, 이광수가 주었던 그 꽃을 받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하면서도 이광수의 곁을 지키고, 살리기 위해 싸우고, 죄책감에서 이광수를 끌어내려 애쓰기도 한다. 연기를 한다기보다는 그냥 그 자리에 있고, 그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때때로, 연기를 본다는 기분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는 대화를 근처 벤치에 앉아서 훔쳐듣는 기분이 들었다.

 

 

관음, 월례, 노파: 셋이 동일인물인 건 전혀 몰랐다. 그런데 난 계속 관음보살이 너무 인상 깊어서 자꾸 그 모습만 생각나네. 관음보살은 퐁실퐁실 따듯, 보송보송한 솜 같다. 발랄한 노란색과 파스텔 핑크의 솜. 마지막에 미력의 이야기를 듣고 관음보살이 웃을 때 진짜 같이 웃었다. 객석까지 포근한 마음이 전해진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는데, 월례 때는 조신과 친해 보이고 아이들과 사이좋아 보이긴 했지만 관음 때 좀 더 자애로운 사랑이 느껴졌다. 솔직히 무대에 그 자애와 자비가 가득 들어찬 듯 느껴졌다. 그래서 자꾸 관음보살이 잊히지 않는다. 노파는, 엄마인 월례와 관음보살과 같은 인물인 줄 진짜 전혀 몰랐다. 프로그램북을 보고서야 알았다. 변화가 엄청나다. 관음보살과 월례는 비슷할 수도 있는 역할인데도 전혀 느낌이 다르다. 공연 볼 땐 다른 인물이 아닌가 싶었는데 미력을 품어 주는 부분에서 어머니 느낌이 나서 어렴풋이 같은 인물인가? 싶었다. 그것도 그냥 인물이 같다고 느꼈다기보단 보통 이런 이야기라면 어머니 월례와 관음보살이 같은 얼굴인 연출이 맞지 않나 하는 생각에. 이 공연 전체에서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이라면 관음보살이고,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라면 쫓기는 사슴 다음으로 관음보살이 미력의 이야기에 웃는 장면이다. 집에 와서도 잠들기 전까지 계속해서 관음보살의 웃음과 그 따듯한 기운을 곱씹었다. 그 순간을 오래도록 갖고 싶다.

최남선: 아주 깊은 바닷속이 떠오른다. 뿌리 박은 나무보다 더 넓은 부분이 심해처럼 꼼짝 않고 있는다. 중심이 단단한 건 나무보다 철의 느낌이다. 나무는 좀 더 살아 있는 단단함이라면 철이나 바다는 표정 없는 단단함 같다. 냉정함과는 다른데, 뭐라고 해야 하나. 담담한 느낌, 흐르지 않지만 고이지 않은 느낌. 이광수와 같은 처지에 있으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힘이 있다. 목소리, 자세, 표정 모두 힘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뻔뻔하지 않다. 아마 좀 더 힘을 낸다면 이광수의 존재감도 잡아먹지 않을까 싶을 만큼 이광수와는 기운의 크기 차이가 크다. 그렇지만 적당히 이광수에게 시선을 몰아주면서도 자신을 향한 집중력을 가져오는 듯하다. 유쾌한 듯하지만 가볍지 않은 인물이다. 처음 나왔을 때부터 아, 이 인물은 이런 성격이구나 하는 게 그냥 서 있는 자세에서부터 느껴진다. 말없이 뒷모습만 보여 줘도 어떤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조신: 따듯한 온기가 있는, 입자가 굵은 모래가 생각난다. 이광수처럼 흐르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흘러서 어디론가 가는 게 아니라 떨어져서 쌓이는 듯 보인다. 모래시계처럼. 쌓이고 흘러내렸으나 흩어지지 않고 차곡차곡 쌓이는 모래. 월례에게 꽃을 바치는 순간부터, 월례가 화랑 모례에게 시집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까지 표정이 달라지는 게 섬세하다. 말없이 표정만으로도 그 마음이 짐작이 갈 정도로 선명한 감정들. 아들 미력을 위해 옛날이야기를 할 때, 그냥 이야기를 들려주는 느낌이었다면 흘려들었을 평범한 동화인데 왠지 '저건 이 극과 관련 있겠구나' 하는 감이 올 만큼 이야기에 힘이 느껴졌다. 시시하고 유치한 동화인데도 버들, 미력과 함께 집중해서 듣게 된다. 조신은 자주 흔들리고, 매번 충동에 넘어가지만 우유부단하지는 않다. 그가 흔들릴 때는 사랑이 걸려 있을 때뿐이다. '인간적이다'라는 표현이 제일 잘 어울린다.

평목, 코러스

: 몸놀림 때문인지 짐승이 생각난다. 약간 여유가 있는, 약하지 않은 동물. 사슴뿔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산양이 생각난다. 사슴보다는 좀 더 가벼운 느낌으로 절벽까지 오르내리는 산양. 평목 배우는 몸집에 비해 더 크게 느껴진다. 친근하고 퉁퉁 튀는, 조신과는 좀 다른 느낌의 인간적인 인물. 통통 아니고 퉁퉁. 묵직하다. 이 배우도 중심이 단단하지만 발이 바닥에 묶이기보다 여기 번쩍 저기 번쩍 툭툭,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오는 이미지. 여기 배우 중 가장 이미지적으로 인상 깊다. 평목이라는 인물이 제일 변화가 커서 그런 것 같다. 그걸 또 그 변화를 매끄럽게 잘 살린다. 조신의 편이었던 사람이 조신을 협박하게 되는 그 차이가 갑작스럽지 않다. 그냥 이쪽 길에서 저쪽 길로 툭 뛰어오른 느낌까지 든다. 갑작스러울 수 있던 변화가 그냥 그렇게 일어났다.

 

 

미력, 최기자, 원님

: 공 같아. 미력 때는 바닥에 떨어져서 가볍게 통통, 짤랑대며 튀어오르는 유리구슬 같고, 최기자 때는 한두 번 퉁퉁 무겁게 튀다가 요란하게 구르는 배구공 같기도 하고, 원님 때는 막대에 맞아서 어느 한곳으로 데구르르 굴러가는 가죽공 같기도 하다. 미력이 호랑이 흉내를 낼 때는 진짜 어린아이 같았다. 표정이나 목소리 같은 게 아니라 몸놀림이 가벼워서. 그냥 몸이 가벼운 사람보다는 몸으로 노는 아이의 움직임 같았다. 유연하고 통통 튀는 느낌. 최기자는 배우 얼굴과 목소리 무게가 어려 보여서 웬만한 남자 기자들보다 대단한 여자 기자라는 인물 설정에 좀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그걸 또 말투와 자세로 무게를 준다. 미력이 죽기 전, 대사와 밝은 조명은 조신과 월례에게 쏠렸는데도 미력이 누나 버들의 주먹밥을 빼앗아 먹는 부분으로 시선이 간다. 분명 쭈그려 앉았고 심지어 뒤돌아 앉아 있었는데도, 움직임이 격렬하지 않은데도 웅크린 모습 그대로 객석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월례, 버들, 코러스

: 버들이란 이름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코스모스나 강아지풀 같다. 수수하면서도 단아한 풀잎이 바람에 산들산들 흔들리는 이미지. 약하다거나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바람이 좋아서 흔들리고, 흔들리고 싶어서 흔들리는 느낌이다. 자유로운 느낌. 월례는 꽃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선선히 기뻐하고, 조신이 좋아서 붙잡고 도망친다. 버들은 동생이 좋아서 먹을 것을 나눠 주고, 가족이 좋아서 눈보라 속에서도 동생과 어머니를 챙긴다. 월례와 버들은 모두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 움직이는 인물이며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비극 앞에서 절망할지언정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는다. 대사도 그렇고 성격도 뻔하다면 뻔해서 자칫 납작한 인물로 눈에 안 띌 수도 있는데 느긋한 평온처럼 그냥 옆에 느껴진다. 짧은 장면에서도 조신을 좋아하는구나, 동생을 아끼는구나 하는 게 느껴지니 인물이 살아난다.

 

 

용선선사, 화랑 모례, 코러스

: 이미지가 하나로 잡히지 않는다. 용선선사 때는 연장자로서의 여유와, 힘이 없는 듯한데 자기 의지가 확고한 허수아비 느낌이었는데 화랑 모례 때는 다른 인물로 보였다. 허수아비가 뭐 우스꽝스럽거나 힘없는 이미지가 아니라 그냥 그 자리에서 당연히 할 일을 하고, 사치나 허세, 허영 따위와 상관없이 그냥 허허롭게 욕심 없이 서 있는 느낌. 양치는 목동 같기도 하고. 그런데 또 화랑 모례 땐 전혀 다르다. 옷차림이나 뭐 걷는 모양 같은 것만이 아니라 그냥 말투와 발성 같은 것에서 나는 둘이 같은 인물인 걸 몰랐다. 그래서 이 배우가 어떤 이미지다, 하기엔 어렵다. 다 다른데, 코러스 때에도 느낌이 달라 버리니까 셋 다 다른 인물 같다. 화랑 모례 때는 물론 인물이 더 힘있고 고집 있는 인물이라 자세며 발성이며 다르긴 한데, 말투 같은 것도 달라지니 허수아비는커녕 무슨 화살 같다. 어딘가를 겨누고 시위를 당긴 활. 화살이 걸려 있진 않으나, 어딘가를 쏘아보는 듯하다.

그림자: 뭔가 깃발 같아. 위치를 알리는 깃발. 처음 등장했을 때는 정체를 짐작하지 못 했다. 암살자라기엔 살의가 없고, 그렇다고 그를 힐난하는 이웃이라기엔 적의와 혐오가 낯선 이를 향한 것과 다르다. 분명 이광수에 대해서 친일 변절자라는 것 외의 많은 것을 알고 있는데, 적의를 갖고 있지만 살의는 없다니. 무대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무대 위에 올랐을 때에야 맨발임을 알았다. 뭔가 이상하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다. 맨발이 의미심장하면서도 노골적이지 않게 느껴졌다. 이광수의 마음속 자책감을 끊임없이 자극하면서도 한편으로 자기 자신을 향해 서 있기 때문인지 혐오감은 분명하나 증오가 보이지 않았다. 증오 없는 혐오와 실망. 이광수와 마찬가지로 하얀 셔츠를 입고 있으나 꼿꼿한 자세와 곧은 눈빛 때문인지 그림자의 모습이 더 빛나는 듯하다. 그러나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은 없다. 지금의 자신을 혐오하고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지만 그렇다고 젊은 자신이 더 당당하다고 내보이진 않는다. 끝까지 자랑스러운 모습을 유지하지 못 했기 때문인지. 증오 없는 혐오와 실망, 살의 없는 적의. 그 오묘한 감정을 잘 살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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